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어뢰 스캔들 (문단 편집) == 미 해군 항공대의 사정 == 미 잠수함대의 중어뢰가 신뢰성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때 미 해군 항공대의 Mark.13 항공어뢰[* 이 어뢰는 미 육군항공대에서도 사용하였다. 실제로 [[미드웨이 해전]] 당시 [[B-26]]이 뇌격에 나서기도 했지만 전과는 거두지 못했다.]도 낮은 신뢰성과 까다로운 사용 조건 때문에 일선에서 외면받았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뇌격기]] 부대가 전과는 하나도 거두지 못하고 거의 전멸해버린 데엔 이 항공어뢰가 한 몫 단단히 했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 항공어뢰 투하조건은 고도 '''15m'''에 200km/h였는데 이미 대공포대, 함재기까지 방공태세를 갖춘 적 앞에서 이런 저공저속비행은 '내가 네 밥이야'라고 하는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것이었고 실제로 어뢰 투하를 준비하던 뇌격기들은 뇌격기 위에 자리잡은 빠른 기동력을 지닌 [[제로센]]을 위시한 일본군 전투기들에게 손쉬운 표적이 되었다. 그렇다고 구형인 [[TBD 데버스테이터]]만 이러면 모르겠는데 신형 뇌격기인 [[TBF 어벤저]] 역시 마찬가지였다. 구사일생으로 적의 요격을 피해서 어뢰를 투하해도 어뢰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어뢰가 공중에서 투하된 후 입수 시의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항주장치나 격발장치가 먹통이 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위의 가혹한 투하 조건도 이러한 신뢰성 문제로 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제로센들이 뇌격기를 요격하러 내려간 덕분에 상공의 빈 틈을 노린 [[SBD 돈틀리스]] 급강하폭격기 부대가 항모를 덮칠 수 있었고 당시 일본 최강의 항모들을 인공어초로 만들 수 있었다.] 당연히 살아돌아온 뇌격기 전대는 이런 조건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호위를 하지 않은 호위전대에 강력한 불만을 표출했지만 그때는 아직 어뢰 그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갈등이 가라앉지 않았다.[* 또 여기에는 당시 부족한 항공전대의 집단전 경험 문제도 있었다. 특히 항모 호넷의 항공대가 항공대장의 오판으로 뇌격기대가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뇌격기]] 조종사들은 역시 "효과도 없는 [[어뢰]] 쓰느니 그냥 철갑탄 쓰겠다."고 해서 한동안 함선을 상대로 어뢰 대신 항공폭탄을 달고 폭격을 해댔는데 이런 방법으로는 당연히 전과가 신통치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상부의 월권 행위라는 외부 사정에 휘둘렸던 잠수함대의 중어뢰와 달리 항공어뢰의 개량에는 이런 방해가 없었고[* 왜 방해가 없었냐면 저 어뢰 투하 조건 자체에 원인이 있다. 이 항공어뢰를 제대로 작동시키려면 상황을 억지로 만들어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태평양 전쟁]] 개전 6개월 후인 [[미드웨이 해전#s-5.4.2|미드웨이에서 이미 수많은 뇌격기 조종사들의 목숨값으로 입증해 버린 것이다]]. '''그것도 육군 항공대와 해군 항공대가 쌍으로!''' 실제로도 육군항공대에서 [[B-26]]을 동원해서 [[미드웨이 해전#s-5.2.2|뇌격을 한 적이 있는데]] 역시 실패했다. 어뢰 스캔들이 공론화될 수 있던 이유와 시점도 사실 잠수함 전대뿐 아니라 뇌격기 조종사들까지 동조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문서 위에도 나오지만 당시 해군에서도 가장 3D에 인식도 나빴던 서열 하위의 잠수함대와 달리 해군 항공대는 해군 내에서도 승리의 주역으로 해군의 핵심 전력 취급받았고 같은 항공직렬인 육군 항공대의 동조까지 받았기 때문에 손쉽게 군 수뇌부를 설득할 수 있었다.]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와의 협조 하에 입수시의 충격으로부터 어뢰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강구하였다는 점이다. 덕분에 항공어뢰는 어뢰 스캔들의 심각성을 입증하고 개선에 나서면서 눈부신 성능 향상을 보여주었다. 1943년 초에는 투하 고도가 60m로 완화되었다. 1943년 말에는 어뢰에 핀 스태빌라이저(fin stabilizer)[* 선박이 좌우로 요동치는 것을 막기 위한 안정 장치.]가 추가되었고 1944년에 이르면 nose drag rings과 둥근 팔찌 모양처럼 생긴 tail shroud ring이 장착되어 뇌격기에서 어뢰가 투하되어 물속으로 입수하기 전에 낙하 속도를 늦추어 적정 속도로 진입하는 것이 가능했다. 1944년에는 고도 약 240m에 약 550km/h로 투하 조건이 완화되었다. 1945년 초엔 고도 1,500 ~ 2,100m에서 떨어뜨린 어뢰도 6발 중 5발이 정상 작동함을 확인했으며 종전 즈음엔 '''고도 730m에 759km/h'''로 투하조건이 완화되었다.[* 사실 이 조건은 이미 1944년에 확인되었다. 760km/h면 당시 전투기들의 속도보다 빠르다. F4U-4의 최대속력은 746km/h까지 나왔으며 스핏파이어 후기형도 최대속력이 710~730km/h이다. 미 해군의 폭격기나 뇌격기는 500km/h도 안 나오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최고 속력은 기준 기상 상황, 지정 고도에서 수평 비행할 때의 이야기다. 적함선을 향해 강하할 때는 에어브레이크를 펴더라도 더 빠른 속력이 나온다. 아무튼 저 조건으로 문자 그대로 600m까지 내려오기만 했다면 그냥 조준점 맞춰 냅다 떨궈도 작동할 정도로 신뢰도가 매우 높아졌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 전쟁 후반 미군 뇌격기들의 어뢰 투하고도는 높았고 그 속도도 빨랐다. 1944~45년 당시 미군의 항공뇌격을 당했던 일본 해군 승조원들은 처음에는 미군 뇌격기들이 어뢰를 너무 급하게 투하하고 달아난다며 의아해하거나 비웃었지만 그런 조건에서도 어뢰가 정상적으로 작동해 돌진해 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너는 이미 죽어 있다|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당사자들인 미군 각군의 항공대가 갖고 있던 기존의 뇌격기 허당 이미지를 깨부수기는 너무 힘들었다. 어뢰 이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던 잠수함대와 달리 뇌격기들은 폭탄을 이용한 수평폭격이나 활강폭격, 해군항공대 전체로 보면 급강하폭격이라는 추가 선택지가 있었다.[* 전함을 상대로는 급강하 폭격기만으로는 격침하기 어려워서 좋든 싫든 뇌격기를 써야 하지만 다행히 일본 전함들은 [[야마토급 전함|호텔 노릇이나 하고 있었으니.]]][* 전쟁 후반에 이르면 HVAR 같은 공대지 로켓이 등장하여 대함공격에 사용되었다. 다만 이때는 로켓의 탄두가 작아서 구축함 이하의 소형 함정은 몰라도 대형함을 상대로는 대공포 같은 외부 구조물들을 파괴하거나 갑판의 승조원들을 날려버리는 정도에 그쳤다. 대형함의 선체에 직접 타격을 줄 수 있는 수준의 대형 로켓(ex.[[타이니 팀]])들은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등장했다.] 항공기를 이용한 뇌격의 효과와 생존성에 대해 불신이 잔뜩 쌓인 전쟁 초중반 미 해군 항공대에게 다른 선택지를 마다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육군 항공대는 급할 때는 영국에서 배워 온 [[폭격#s-4.2.3|물수제비 폭격]][* 제식 용어로는 skip bombing. 일본군 측에서는 반도폭격이라고 했다.]까지 동원해 어떻게든 결과를 만들어냈다. 대표적인 사례가 [[비스마르크해 해전]]. 이 때문에 전쟁 중반까지는 전투력이 살아 있는 목표물에 대한 항공뇌격은 사실상 없었고 선행 공격에 의해 절름발이가 된 표적을 상대로 한 것이 전과의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항공어뢰에 대한 불신을 완전히 씻어낸 것은 [[필리핀 해 해전]] 이후였다. 기묘하게도 일본군 항공모함 [[히요(항공모함)|히요]]도 필리핀 해 해전에서 미 항모전단의 공습으로 어뢰를 맞고 침몰했다. 1943년 6월 10일에 트리거의 어뢰에 맞았는데도 어뢰 결함으로 살아남았고 그것 때문에 록우드 제독이 폭발했으며 이것을 계기로 자기기폭장치의 사용금지명령이 나오게 되었음을 생각하면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제때 개선되지 않은 어뢰가 적 항모라는 중요 목표물을 박살낼 기회를 날린 얘기이기도 하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